상명대학교박물관 유물을 만나다 (89) 종이
- 작성자 학예사
- 작성일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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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9일, 박물관은 미래백년관 기획전시실에서 2018년 상명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물 특별전 <문방사우 : 선비의 네 벗>을 열었다. 이에 ‘상명대학교 박물관 유물을 만나다’코너에서 총 4회에 걸쳐 종이, 붓, 먹, 벼루 중 주요 소장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종이와 제지법이 전해진 시기는 『일본서기』에 610년 담징이 종이를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7세기 보다 이른 시기로 추측할 수 있다. 종이의 발달은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고려시대 대규모 불경 간행 사업과 서적의 보급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각 지방마다 지전(紙田)을 두고 종이의 생산을 국가적으로 독려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서적의 보급과 다양한 간행사업으로 종이 수요가 더욱 증가하여, 조선 초부터 관영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종이 전문 장인인 지장(紙匠)을 중앙관서에 소속된 경공장뿐만 아니라 지방관청 소속의 외공장도 두었는데, 외공장은 전주, 남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분포했으며 현재까지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종이는 제작 원료에 따라 물이끼와 닥나무를 섞어 만드는 태지(苔紙), 닥나무로 만든 저와지(楮渦紙), 뽕나무로 만든 상지(桑紙), 버드나무 잎으로 만든 유엽지(柳葉紙), 용도에 따라 창호지, 도배지, 화선지, 순지, 배접지, 그리고 두께에 따라 홑지, 이합지, 삼합지, 육합지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본 소장유물은 전주에서 생산된 태지이다. 태지는 솜털이 일고 이끼가 박혀 있으며 질긴 것이 특징이다. 이동희의 「전주한지의 역사성에 관한 기초적 고찰」(2014)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전주는 남원과 함께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쓰이는 당대 최고 품질의 종이를 생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실록』 95권, 중종 36년(1541년) 6월 25일 경진 1번째 기사에, 병조판서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태지(苔紙) 5속(速)을 만들어 진상하고 만드는 방법을 아뢰며 이를 권장하니, 조지서(造紙署)에 내려 그것으로 견본을 삼아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부터 태지가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